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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 (완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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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원사는 전라북도 완주군에 위치한 사찰이다. 고구려 승려 보덕의 제자들이 신라로 귀화한 후 완산주에 머물면서 670년에 창건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난원, 의천, 복세, 혜근 등의 고승들이 머물렀으며, 조선 시대에는 왕족과 진묵대사 등이 거쳐갔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으나 진묵대사에 의해 중건되었고, 1900년에는 강증산이 도를 깨우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대웅전 뒤편에는 5층 석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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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 (완주군)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사찰 이름완주 대원사
종파조계종
국가대한민국
소재지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번지
건립 정보
건립 연대670년(신라 문무왕 9년)
창건자일승(一乘)·심정(心正)·대원(大原)

2. 주요 역사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모악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대원사는 670년(신라 문무왕 9년)에 창건되었다. 창건 이전, 고구려 말기 고승 보덕의 제자였던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은 고구려백제의 멸망을 겪으며 통일 신라에 귀화하였다.

670년, 세 선사는 대원사(大院寺)를 창건하였다. 창건 이후 후백제고려 시대를 거치며 학덕 높은 승려들을 배출하며 명성을 얻었다.

고려 시대에는 1066년(고려 문종 20년) 국사 난원`(爛圓)`[1]과 그의 조카 의천`(義天)`[2]이 잠시 머물렀고, 1136년(고려 인종 14년)에는 복세`(福世)`[3] 국사가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에는 혜근`(惠勤)` 선사가 중창하여 그 명성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조선 시대에는 1415년(조선 태종 15년) 왕족인 영천군 이담과 그의 아들 풍안군 이효손 부자가 머물렀으나, 1597년(조선 선조 30년) 정유재란왜적에 의해 소실되었다. 이후 1606년(선조 39년)부터 1612년(조선 광해군 4년)까지 고승 진묵`(震默)`[4] 대사가 6년에 걸쳐 중건하였다. 1733년(조선 영조 9년)에는 천조(千照) 스님이 대웅전과 명부전을 증건했으며, 1886년(대한제국 고종 23년)에는 금곡(錦谷) 스님이 칠성각을 짓고 김제 내원암의 염불당을 옮겨왔다.

대한제국 시대인 1900년(광무 3년)에는[5] 종교사상가 강증산`(姜甑山)`[6]이 이곳에서 철학를 깨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1. 완주 대원사의 창건 이전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모악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대원사는 670년(신라 문무왕 9년)에 창건되었다. 이 절의 공동 창건자로 알려진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은 원래 고구려 말기 고승 보덕(普德) 화상의 제자들이었다.

이들의 여정은 650년(고구려 보장왕 8년, 백제 의자왕 9년) 시작되었다. 스승 보덕을 따라 고구려를 떠나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6년 뒤인 656년(백제 의자왕 15년), 보덕 화상은 백제를 떠나 아스카 시대 일본나라로 건너갔지만, 세 제자는 스승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같은 해 백제완산주 지역으로 옮겨가 불교 수행을 이어갔다.

완산주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660년(백제 의자왕 19년, 신라 태종 무열왕 6년) 백제가 멸망하는 것을 겪었다. 이후 스승 보덕은 667년(신라 문무왕 6년) 3월 3일, 일본에서 돌아와 통일 신라의 완산주에 있던 경복사(景福寺)로 거처를 옮겼다. 이듬해인 668년(신라 문무왕 7년), 보덕 화상과 세 제자(일승, 심정, 대원)는 경복사에서 다시 만났다. 같은 해, 그들은 자신들의 고국이었던 고구려마저 신라에 의해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격변 속에서 그들은 통일 신라에 귀화하여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2. 2. 창건 이후

670년(문무왕 9년), 고구려 출신의 신라 귀화 승려인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 등 세 선사에 의해 '''대원사'''(大院寺)가 처음 세워졌다. 창건 이후 후백제고려 시대를 거치며 학덕 높은 승려들을 배출하며 명성을 얻었다.

고려 시대에는 1066년(문종 20년) 국사 난원(爛圓)[1]과 그의 조카 의천(義天)[2]이 잠시 머물렀으며, 1136년(인종 14년)에는 복세(福世)[3] 국사가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1374년(공민왕 23년)에는 혜근(惠勤) 선사가 중창하여 그 명성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조선 시대에는 1415년(태종 15년) 왕족인 영천군 이담과 그의 아들 풍안군 이효손 부자가 머물기도 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왜적에 의해 불타 폐허가 되었다. 이후 1606년(선조 39년)부터 1612년(광해군 4년)까지 고승 진묵(震默)[4] 대사가 6년에 걸쳐 절을 다시 세웠다. 1733년(영조 9년)에는 천조(千照) 스님이 대웅전과 명부전을 증건했으며, 1886년(고종 23년)에는 금곡(錦谷) 스님이 칠성각을 짓고 김제 내원암의 염불당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대한제국 시대인 1900년(광무 3년)에는[5] 종교사상가 강증산(姜甑山)[6]이 이곳에서 철학를 깨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2. 1. 고려 시대

고려(高麗) 시대에 들어서도 대원사의 명성은 이어졌다.

1066년(문종 20년)에는 국사 난원(爛圓, 1029?~?)[1] 스님과 그의 조카(누나의 아들)인 의천(義天, 1055~1101)[2] 선사가 이곳에 한 달 남짓 머물렀는데, 이 일로 대원사는 다시 한번 유명세를 얻었다.

1136년(인종 14년)에는 고승 복세(福世, 1090~1141)[3] 국사가 절을 크게 넓히고 다시 세웠으며(증창 및 재창건), 이로써 대원사의 명성은 더욱 굳건해졌다.

고려 말기인 1374년(공민왕 23년)에는 혜근(惠勤, 1320~1376) 선사가 절을 고쳐 세웠고(중창), 이때 다져진 명성은 조선 시대 초기까지 이어졌다.

2. 2. 2. 조선 시대


  • 조선 초기 태종 15년(1415년)에는 왕족인 영천군 이담과 그의 아들 풍안군 이효손 부자가 전라도 완주 '''대원사'''에서 보름 동안 머물렀다.
  • 조선 중기 선조 30년(1597년)에는 정유재란으로 '''대원사'''가 왜적에게 불타 소실된 후 약 9년간 폐허 상태로 남았다.
  • 조선 중기 선조 37년(1604년) 이후, 전라도 김제 출신의 고승 진묵[4] 대사가 완주에 정착하여 선조 39년(1606년)부터 광해군 4년(1612년)까지 약 6년에 걸쳐 '''대원사'''를 중건하였다. 진묵대사는 1612년부터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 조선 중후기 영조 9년(1733년)에는 천조 스님이 '''대원사'''의 대웅전과 명부전을 증건하였다.
  • 조선 말기 고종 23년(1886년)에는 건봉사 출신 금곡 스님이 '''대원사'''에 칠성각을 짓고, 김제 내원암에 있던 염불당을 '''대원사'''로 옮겨왔다.

2. 2. 3. 대한제국 시대

1900년(광무 3년) 대한제국 초기에는[5] 종교사상가인 강증산(본명: 강일순, 1871~1909)이 대원사에서 철학를 깨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6]

3. 대웅전 관련

완주군 대원사 대웅전 뒤편에는 5층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높이가 238cm이며,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형태이다.

참조

[1] 인물 문종(왕휘)의 처갓댁 손아랫처남
[2] 인물 문종(왕휘)의 넷째아들
[3] 인물 문종(왕휘)의 친손이자, 인종(왕해)의 친숙부이고, 의천(義天, 속명: 왕후)이라는 선사의 친갓댁 친조카
[4] 인물 김병익의 아들이자, 함열 남궁씨의 아들, 2남 3녀(5남매) 중 막내(차남)로 출생하여, 1568년 7세 남짓 시절에 동자 승려로 출가
[5] 역사 대한제국 고종 치세 시절의 광무 시대
[6] 종교 강증산이 대원사라는 이 사찰에서 철학의 도를 깨우친 계기 및 동기로써 1901년 증산교를 창설하는 계기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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